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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수업/입체조형

[스크랩] 1957.03.16 프랑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세상 떠남

by 홍차쌤 2013. 12. 3.

1957.03.16  프랑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1875-1957) 세상 떠남

 

 

 

 

 

 

 

 

루마니아의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사망(1957-03-16)
-네이버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80431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내 아트리에에 날아 들어왔다. 
    그 새는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출구를 찾지 못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유리창과 벽에 이리저리 부딪쳤다. 또 한 마리 새가 날아 들어왔다. 이 새는
    잠시 받침대 위에서 쉬고는 하늘로 향한 길을 쉽게 찾아내 날아가 버렸다.
    예술가에게도 이 두 가지 상황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브랑쿠시 '공간의 새'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새는 '날개'가 없다.

날개는커녕 부리와 머리도 보이지 않고,새의 생김새를 찾을 수 없다.

거의 평생을 '새 만들기'를 위해 살아 온 그에게 도대체 '새'란 무엇이란 말인가. 흡사 노예처럼 '모든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 바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렸을 때,나는 항상 큰 나무 사이나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꿈을 자주 꾸었다.

이 꿈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지금부터 그 그리움을 나의 일로 실천하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새이다.

그러나 새 자체가 아니라,새가 하늘로부터 얻은 능력인 나는 것 곧 비상이다" 새가 된 브랑쿠시의 '비상'(飛翔). 이것이 그의 예술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일생 동안 오직 한 가지,비상의 본질만을 추구해 왔다. 비상이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라고. 어디 브랑쿠시뿐이겠는가. 삶의 구비마다 갑갑하고 답답할 때,훌쩍 활개치고 치솟아 훨훨 날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이내 수그러 든다.

그러나 브랑쿠시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비상'하고자 했으며,결국 날게 되었다.

날개 없이 날아 오른 그 감격적인 절정의 체험. 그 '비상의 순간'을 포착한 게,이 작품 '공간의 새'(1927,브론즈,높이 184.1㎝,워싱턴 국립미술관)이다.

'빛의 화살'처럼 휘익 소리내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상승하는 듯,생기에 찬 '빛나는 형태의 비상'. 단순성과 완전성의 극치다.

정지하고 있는 물체의 비상,무게 있는 것이 무게 없는 가벼움이 된다는 이 역설의 미학. 그가 이룬 조각예술의 새로운 경지다.

전체적으로 아랫부분의 원뿔 형태가 안정감을 이루고,그 위에 이어지는 몸체는 팽팽하게 생기를 머금고 유선형이 되어 수직으로 곧장 날렵하게 상승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쪽의 뾰족한 끝은 경사진 면이 되어 비상의 힘을 더하며 텅 빈 공간의 기운과 맞닿아 있다. 브론즈의 표면을 거울같이 연마하여 고도의 광택을 지닌 저 몸체. 거울이 된 표면에는 주변의 풍경들이 비쳐들고 드리워져서,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형상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아롱거린다. 어쩌다 볼록면이 직사광선을 받았을 때,섬광같은 강렬한 반사광에 의해 수직의 윤곽선과 입체감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무화(無化)되어 공간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물질과 빛의 결합. 이 기막힌 물질의 변용,비물질화의 순간이 곧 비상이 아니겠는가. 말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정신의 번뜩임….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1907~1986)는 브랑쿠시의 '공간의 새'에 대해 언급하면서,"비상은 무게가 소멸되었음을 선포한다.

즉 그것은 존재론적인 변형이 다름 아닌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났음을 선언한 것"이며,그리고 "일상적인 경험 세계에서의 탈출을 표현한 것으로 비상을 통해 인간은 초월과 자유를 한꺼번에 획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비상은 영적 생명의 깨어남이며,무아적 체험의 순간이며,지상에서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그의 '새'연작은 3단계로 이행되어 왔다.

'마이아스트라'(Maiastra,1910~15,총 7점)에서 '금빛 새'(Golden Bird,1916~23,총 4점)를 거쳐,'공간의 새'(Bird in Space,1923~41,총 16점)에 이른다.

'마이아스트라'는 루마니아의 민담에 나오는 전지전능한 마력의 힘을 가진 새이며,그의 작품에서는 직립하고 있는 형상으로 역시 날개는 없고 가슴이 볼록한 유선형으로 부리가 조금 보일 뿐이다.

'금빛 새'는 정지하고 있는 수직의 추상적인 형상으로 새의 표정이 말끔히 지워졌다.

'공간의 새'에 와서 비로소 비상의 움직임이 강조된 유선형이 되고 있다.

'공간의 새'이후,그의 작품은 실내를 벗어나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고,고향 티르그쥬의 대지 위에 하늘을 향해 치솟는 수직의 거대한 '무한주'(Endless Column,높이 30m)로 다시 한번 변신한다.

마침내 광대무변한 우주의 창공에 가 닿는 상승과 비상,초월에의 의지를 영원한 '하늘의 기둥'으로 실현하였다.

그는 말하길,"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고,내 인성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다.

나는 본질적인 사물들 속에 존재한다.

" 그렇다면,그는 드디어 저 장자(莊子)에 나오는 '붕(鵬)새'라도 된 것일까.

- 지역의 빛으로 독자의 희망으로 (부산일보 창간 60년) -

 

/부산일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 ]

1876. 2. 21 루마니아 호비타~1957. 3. 16 파리.

루마니아 태생 프랑스의 조각가.

 

 

우아하고 절제된 기하학 형태와 정교한 끝손질을 특징으로 하는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한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이다. 목각에 심취하여 종종 나무로 원형을 새긴 뒤 나중에 다른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향토적인 멋이 깃들어 있는 나무조각들을 많이 만들었다. 〈입맞춤 The Kiss〉(1908)이 첫 주요작품이었다. 1912년부터는 비상하는 새들을 주제로 하여 더욱 추상화된 많은 조각들을 만들었다.

 

초기생애

브랑쿠시의 부모인 니콜라스 브랑쿠시와 마리아 브랑쿠시는 가난한 시골사람들이었으므로 당시의 다른 시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7세 때부터 목동으로 일하면서 처음에는 가축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그뒤에는 카르파치아 산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나름대로 연장과 도구를 만들어 목각을 배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루마니아의 시골에서는 예로부터 목각을 이용해 숟가락이나 침대 기둥, 치즈 압축기 등을 만들거나 주택의 정면을 만들어왔다. 이러한 장식 양식이 브랑쿠시의 여러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취미와 태도 및 생활방식은 착하고 단순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한편으로는 어린애 같으면서도 약삭빠른 듯한 시골 사람들의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는 9세도 되지 않아 일자리를 구하러 올테니아 주의 페스티사니 근처에 있는 티르구지우로 갔다. 맨 처음에는 염색공으로 일했으며, 2년 뒤에는 슬라티나의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다가 그뒤에는 올테니아의 중심 도시인 크라이오바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러나 목각에 대한 취미는 여전하여 오렌지 포장용 나무상자로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다. 훗날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어 고향에서 널리 연주되던 멜로디를 늘 연주하곤 했다. 또 나무로 백합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자질구레한 기술들이 한 제조업자의 주의를 끌어 1894년 그의 후원으로 크라이오바 미술공예 학교에 들어갔으며, 거기에서는 특히 목공예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워야만 했다.

 

1896년 20세 때 처음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여, 빈으로 가서 체류하는 동안의 비용을 벌기 위해 목세공인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1898년 부쿠레슈티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 학교에서는 전통주의자들의 작품보다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에 훨씬 더 이끌렸지만, 모형 제작과 해부학은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시절에 제작한 조각 가운데 〈해부 모형 Ecorché〉(1902)은 모교에서 사들였고 해부학 수업용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1903년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받아 루마니아 의학교육의 창시자인 카롤 다빌라 장군의 흉상을 만들었다. 바로 그해에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부쿠레슈티까지 명성이 자자하던 파리의 오귀스트 로댕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로댕의 대담성은 전위파 예술가들의 열광과 전통주의자들의 분개를 동시에 야기시켰다. 루마니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진 브랑쿠시는 처음에 뮌헨으로 가서 1904년 봄까지 거기에 머물다가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그것은 돈이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 꽤 부담스런 여행이었다. 그는 배낭을 메고 거의 걸어서 여행했으며, 더욱이 보덴제 호를 건너는 배삯을 마련하느라 시계를 팔기까지 하여 마침내 7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피렌체 르네상스의 거장들에 영향을 받은 전통주의자 앙토냉 메르시에(1916 죽음)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2년 동안 그와 함께 일했지만, 생계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계속 음식점에서 접시를 닦았으며 루마니아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 만난 루마니아인들도 그에게 초상화 제작을 주문해 그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1906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전국미술협회 미술전람회에 출품했으며, 뒤이어 가을 살롱전에도 출품했다. 그의 첫 작품들은 로댕의 힘찬 작품에 영향을 받아 여전히 고전적이면서도 대단한 활력을 보여준다.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브랑쿠시는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07년 부유한 지주로부터 루마니아의 부자우 공동 묘지에 기념상을 만들어 달라는 청탁을 받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무릎 꿇고 있는 어린 소녀의 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의 양식이 단순해지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이무렵 그는 부쿠레슈티에서 해마다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이는 '티네리메아 아르티스티카' 전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으며,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작업실을 빌렸다. 1908년 얼굴 모습이 조형되지 않은 대리석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여인초상인 〈잠자는 뮤즈 Sleeping Muse〉의 원형을 마지막으로 적어도 로댕의 영향은 사라졌다. 바로 그해에 브랑쿠시는 처음으로 〈입맞춤〉이라는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나중에 그의 특징이 된 기하학 양식을 확실히 드러냈으며, 이것은 그뒤 많은 미술가들의 작품, 특히 1910년부터 그의 동료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그의 조언에 따라 만들기 시작한 일련의 조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숙기

1910년에 브랑쿠시는 〈잠자는 뮤즈〉를 개작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청동상은 머리가 분리되어 있으며 얼굴 형태를 달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눈·코·입을 평부조와 같이 새겼다. 브랑쿠시는 1912년까지 석고와 청동을 두루 사용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형태의 〈잠자는 뮤즈〉를 만들었다. 이때 평부조를 새긴 달걀 형태가 그의 조각에서 자주 나타났는데, 1911년의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에서는 조상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하여, 1915년의 〈신생아 The New-Born〉에서는 곡선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달걀 형태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향들은 1924년 마침내 〈태초 The Beginning of the World〉라는 대리석으로 만든 완전한 달걀 형태의 작품을 낳았으며, 브랑쿠시는 이것을 "눈 먼 사람을 위한 조각"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브랑쿠시의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성숙한 작품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주제는 새였다. 이 주제는 1912년 〈마이아스트라 Maiastra〉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그것은 루마니아의 민간전설에 나오는 기적의 새의 이름이다. 머리를 들어올리고 날아가는 이 새의 모습을 순수한 형태로 묘사하고 있는 첫 작품을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그뒤 1940년까지 이와 비슷한 작품을 28개 만들었다. 1919년 이후로 〈마이아스트라〉는 〈공간의 새 Bird in Space〉로 바뀌었다. 이것은 매끄러운 청동상으로, 타원형의 가는 선으로 재빠른 비행의 본질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1912년 브랑쿠시는 '부쿠레슈티 미술전람회'에서 조각으로 1등상을 탔다. 1913년 파리의 앵데팡당전에 계속 작품을 전시하는 한편, 1933년까지 많은 개작품들이 만들어진 양식화된 흉상인 〈포가니 양 Mademoiselle Pogany〉을 비롯한 5점의 작품을 뉴욕의 아모리 쇼 전시회를 비롯하여 시카고·보스턴 등지에서 전시했다. 이때 미국에는 이미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그의 작품을 열심히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비평가들은 계속 그를 공격했다.

 

브랑쿠시는 무엇보다도 조각 그 자체를 사랑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조각을 하는 데에는 "미술가와 재료 사이의 가차없는 대결"이 필요하다. 그는 때때로 오크나 밤나무를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최초의 목조상은 1914년의 〈방탕한 아들 The Prodigal Son〉로, 오크 나무로 만들었으며 거의 추상조각에 가까웠고, 얼굴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조각한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일련의 나무 조상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작품의 모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언제나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데, 때때로 5, 6개의 작품을 포개놓기도 하여 수시로 변화를 주었다. 그는 가구와 심지어는 침대 및 파이프를 비롯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었다.

 

1918년 그는 〈무한주 Endless Column〉의 첫 작품을 나무로 만들었다. 이 기둥은 루마니아 농가의 기둥에서 영감을 얻어 대칭 요소들을 되풀이해서 포개놓아 만든 것으로, 사실 창공으로 무한히 뻗어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브랑쿠시가 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나타낸 숭고한 정신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그는 시골생활을 사랑하는 자신의 성향에 어울리게 단순한 방법으로 언제나 인간과 우주의 일정한 형이상학적 관계를 나타내는 데에 골몰했다. 1920년의 살롱전에 외설적인 남근(男根) 형태의 가공 인물상인 〈프린세스 X〉를 전시하여 일대 스캔들을 일으켰다. 경찰이 개입하여 음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작품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쿠레슈티에서는 아르타로마나 그룹과 함께 공동전시회를 가졌다. 1922년에는 대리석상인 〈물고기〉와 목상인 〈청년 토르소 Torso of a Young Man〉의 원형들을 만들었다. 1924년 처음으로 루마니아에 돌아왔으며, 1926년 뉴욕의 브루머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중요한 작품전람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에 갔다. 그는 프랑스에서 배로 들여온 화물 때문에 미국 세관과 2년에 걸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구리로 만든 〈공간의 새〉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세관원들이 그것을 조각품이라고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미국에 산업 부품을 몰래 들여온 죄로 고발했던 것이다. 1928년 그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호응을 얻었고 재판에서도 이겼다.

 

후기생애

1933년 인도의 마하라자가 그를 만나러 파리에 와서 그의 조각품들을 소장할 전당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브랑쿠시는 여러 해 동안 작업하여 '명상과 구원의 전당'을 설계했으며, 1937년 마하라자의 초청으로 인도에 갔다. 그러나 마하라자가 죽는 바람에 그는 그 계획을 실현할 수 없었다. 한편 1933년에 그는 브루머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전람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되돌아갔으며, 1934년에는 시카고 르네상스 협회에서 열린 20세기 회화·조각전에 참가했다. 1937, 1938년에는 루마니아로 돌아가 티르구지우의 공원에 세운 기념물 개막식에 참석했는데, 그 기념물은 〈입맞춤의 문 Gate of the Kiss〉·〈침묵의 탁자 Table of Silence〉와 30m 높이의 강철로 된 〈무한주〉 개작품 등이었다. 1939년 그는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 시대의 미술전'(Art in Our Time)에 참가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에 갔다. 마지막 중요작품은 1943년의 〈날으는 거북이 Flying Turtle〉였다. 그후 미국과 유럽에서 열린 수많은 전람회에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가장 큰 전람회는 1955년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전람회로, 여기서는 그의 모든 작품이 전시되었다. 1952년 6월 13일부터 시행된 귀화법(歸化法)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옮겨 원래의 상태로 복원한다는 조건으로 작업실에 있던 모든 것(조각품은 80점이 조금 넘음)을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에 유증했다. 그는 일생 동안 한번도 골프를 치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골프채가 전시되어 있으며, 그외에 그가 사용한 투박한 가구와 연장들도 볼 수 있다.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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